『붓다, 나를 흔들다』는 부처님의 일상에서 출발해, 스스로에 대한 탐구를 거쳐 세상으로 나아가는 깨달음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여러 사건과 이치에 맞는 해설을 통해 불교를 알기 쉽게 풀어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다.
이 글에서는 책에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불교의 깨달음의 이치를 소개함으로써 이 책을 읽고나서, 불교의 교리와 진리가 궁금해진 사람들을 위한 약간의 가이드를 제공한다.
불교는 왜 종교일까?
부처님을 전지전능한 신으로 믿기 때문에 종교라고 부를까? 윤회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신화적인 전설을 다루기 때문에 그럴까? 오늘날 불교가 기복신앙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는 것은 사실이지만, 태초에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했을 때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즉, 본래 불교는 신에게 원하는 바를 빌거나 복을 기원하는 신앙이 아니라, 깨달음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수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최초로 그 깨달음을 얻은 자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깨닫게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 걸까? 법륜스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스스로 알아버린 사람, 다시 말해 깨달은 사람은 다시는 의문이나 의혹을 품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 <붓다, 나를 흔들다>, 법륜 - 밀리의 서재
깨달음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의문과 의혹이 사라진 상태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 지식을 안다고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인플레이션이란 화폐 가치가 떨어져 생활물가와 자산 가격이 오르는 현상이다. 이 정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직접 월급을 벌고, 물가 상승을 체감하고, 경제의 흐름 속에서 그것을 ‘느낄’ 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불교의 깨달음도 이와 같다 —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지식을 단순히 아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쓴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이들을 위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영상을 함께 남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세상이 공(空) 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空)은 흔히 없다 라고 해석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비어 있다’는 말을 ‘없다’라고 오해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를 허무주의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무아(無我)
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아(無我)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무아’는 ‘무아지경’의 그 무아다. 게임에 몰입하거나, 발표에 집중하거나, 영화에 깊게 빠져들 때 우리는 어느새 ‘나’를 잊는다. 이때 느끼는 몰입의 순간이 일상의 무아이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내 몸이 있고, 내 생각이 있으며,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나’가 없다는 말일까? 하지만 실제로 ‘나’라는 것은 정신적·언어적 개념에 불과하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우리가 ‘나’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Default Mode Network라는 시스템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기억과 생각을 종합해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돕는 기능이다.
필자 역시 과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여러 과학 콘텐츠를 통해 무아를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의 영상들은 무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영상들을 통해 과학적으로 나를 입증할 수 없도, 나라는 개념은 그저 뇌가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무아, 내가 없다는 이야기는 몸이 내가 아님을 알며, 과거도 내가 아님을 알고, 미래도 내가 아님을 알며 지금이라는 순간의 시간과 공간과 육체와 생각 그 너머에 무엇인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무아의 훈련
무아라는 개념은 글의 지식으로만 인식한다면 이내 허무주의에 빠져들기 쉽다. 직접 체험하고 경험해야지만 느낄 수 있는 말로 전달하기 어려운 감각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의 명상 훈련법을 공유한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 안, 나 혼자 있는 고요한 방안, 친구들과 노는 중간 잠깐 눈을 감고 어둠을 응시하는 거다. 어둠을 바라보며 숨을 쉬다보면 시각도, 청각도, 촉각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모든 정보를 차단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정보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내 나라는 경계도 사라진다. 이 순간이 왔을 때 끝내 나는 몸이 아니며, 생각이 내가 아님을 경험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에도 제약되지 않을 수도 있고. 무의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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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몰입하면 나는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연기법과 인연
세상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이 시간과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의미다. 내 몸도, 내 생각도, 특정한 시기와 조건이 만나 이루어진 결과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 흩어진다. 이처럼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인연에 따라 사라진다.
‘인연’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이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고, 결과 없는 원인도 없다. 불교는 힌두교의 윤회 사상을 인연의 법칙으로 재해석한다. 법륜스님이 자주 하시는 설명으로 과거에 원수라서 지금 원수가 아니라, 지금 원수인걸 아니까, 과거에도 원수였을 것이라는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는 고정된 자아를 느끼는 이유는 관성 때문이다. 늘 하던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이게 나야’라고 믿는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인연 따라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어떤 변화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내일 내가 부자가 되든, 거지가 되든,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공하다는 것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다는 뜻이다. 비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상태다. 고통도, 기쁨도,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분별을 내려놓고, 모든 경계를 허물면 우리는 지구와 우주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별의 아이들이다.
책, 붓다 나를 흔들다
다시 돌아와서 책 붓다, 나를 흔들다는 이 글처럼 불교 교리를 딱딱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처님의 일상을 따라가며 깨달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부드럽게 전한다.
이 글에서의 불교의 대한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붓다, 나를 흔들다』를 읽다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이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도 이어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철학서 같지만 따뜻하고, 종교서 같지만 인간적이다. 삶의 방향을 잃은 이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