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야기 안에 살아간다. 이는 단지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인간이 특정한 이야기(즉 내러티브)에 대한 믿음에 따라 삶의 방향과 의미를 설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SNS의 영향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타인의 삶의 이야기—화려한 일상, 성공적인 경력, 감정적으로 과장된 서사—를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하고, 왜곡된 기준(월 천만원, 대기업이 아니면 실패한 인생, 직장인은 바보 등등 이외에도 남과 비교하며 왜곡된 기준을 가지기 쉬워졌다.)으로 스스로를 판단하게 된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스토아 철학은 '삶의 이야기틀'을 해석하는 방식, 즉 내러티브를 다시 구성하는 리프레이밍(reframing)의 철학으로 우리들의 삶을 왜곡된 기준에서 구원하여 우리에게 다시 돌려준다. 스토아 학파는 우주를 이성적이고 조화로운 구조로 바라보며, 인간이 그 일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서사적으로 정립한다. 내러티브의 주도권을 다시 내 손에 쥐는 것, 그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이 주는 평정의 시작이다. 이제 스토아 철학을 만나보자.
당신은 운명을 믿는가? 철학의 출발점
모든 철학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고대 스토아 철학은 이 질문에 대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즉, 이 철학은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탐구다.
예컨대, 태양이 뜨고 지는 것, 계절이 바뀌는 것, 인간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인간이 결코 바꿀 수 없는 필연적인 사건들이다. 스토아 철학은 이런 현상이 단순한 우연이나 신의 변덕 때문이 아니라, 로고스(Logos)라 불리는 우주의 이성적 질서(즉, 신적 이성과 자연법)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운명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도 똑같이 작용한다.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는 지도자가 독재를 선택하기 쉽다. 국민의 역량이 부족해도 자원을 통해 경제를 유지하며 권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인간개발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국민의 지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민주주의적 요구가 커져 자유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인간 개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돈에 대한 결핍을 경험한 이가 있다고 하자. 동일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주의 정권에서는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아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자유시장 체제에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부를 축적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자연적, 사회적, 개인적 조건 속에 운명은 늘 작용하고 있다.
받아들임의 미학, 그러나 수동적이지 않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려 한다. 이를 통해 외부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평정을 유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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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제할 수 있는가?
스토아 철학은 다음 세 가지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영역으로 본다:
판단(Judgment):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의지(Volition): 어떤 가치를 따르고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한 결정.
욕망과 충동(Appetite & Aversion): 무엇을 원하고 피할지를 훈련을 통해 제어하는 것.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생각과 판단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실상 우리가 직접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적이다. 생각은 사건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며, 우리는 그 생각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판단을 내릴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 괴롭다고 느낄 때 스토아 철학은 묻는다: "돈이 없다는 사실 자체는 단지 하나의 상태다. 그것을 비극이나 실패로 해석할 때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 고통은 돈 때문이 아니라, 해석 때문이 아닌가?"
세네카(로마 제국 시기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이며, 대표적인 후기 스토아주의자)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은 부족함이 아니라, 불만족에서 비롯된다." 스토아 철학은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곧 자유이며, 통제다.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숏츠나 짧은 영상처럼 자극적인 콘텐츠에 쉽게 시간과 주의를 빼앗긴다. 자기 전에 도파민 충전을 위해 영상 하나를 켰다가, 어느새 새벽 2시, 3시가 되어 있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는 자신의 시간을 외부 자극에 넘겨버린 결과다.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우리의 의지를 통해 결정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은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소비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사용하라고 경고한다. 지금 이 순간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는 곧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선택이다.
무엇을 멈출 것인가
스토아 철학은 무엇을 할지뿐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각적인 감정 반응, 불필요한 걱정, 중독적인 습관은 우리를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이끈다. 멈춘다는 것은 도망침이 아니라, 스스로를 중심에 되돌리는 선택이다. 무엇을 멈출지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통제를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또한 주변 환경을 바꾸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스마트폰을 시야에서 치우거나 방을 정리하고,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 모두는 의지를 돕기 위한 환경 설계다. 의지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라고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돕기 위해 환경을 먼저 변화시키는 것이 현명한 방식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한다.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통제에 실패하더라도 자책하거나 낙담하기보다는, 다시 이성적 삶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 또한 스토아적 태도다.
타인은 가장 대표적인 통제밖의 존재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관계에서도 타인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그 관계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고민한다. 에픽테토스는 "타인의 말과 행동은 그들의 몫이며, 나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정의롭고 관대하게 대할 자유가 있다."
타인의 무례함이나 부정적인 행동은 그들의 문제이지, 내 평정을 흔들 이유는 없다.
스토아 철학은 관계를 단절하거나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에 대한 기대와 통제를 내려놓음으로써 내면의 자유를 얻고, 이성적으로 반응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관계의 회복이며,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스토아 철학은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회피하는 철학이 아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삶을 강조한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태도는 모든 사건이 반드시 그러했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덕과 이성을 실현하려는 사랑의 철학이다.
불교의 무상과 집착 해체, 기독교의 신의 뜻에 대한 순응과 사랑, 현대 심리학의 수용전념치료(ACT)와 인지행동치료(CBT) 모두 스토아 철학과 통하는 바가 있다. 이는 결국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태도를 바꿈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