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야기에 지배받는다. 검증되지 않은 말이라도 반복해서 들으면 진실처럼 느껴지고, 그 반복은 곧 사회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이야기의 반복성을 이용해 제품과 신념을 팔아왔다. “성공하는 비법”, “월 천만 원 버는 방법” 같은 콘텐츠가 넘쳐나고, 우리는 그것을 믿으며 스스로를 비교하고, 평가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세상을 나누는 경계가 된다. 어떤 직업이 더 가치 있는지, 어떤 삶이 더 성공적인지를 정해주는 듯한 경계 말이다. 우리는 이 경계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타인의 생각으로 짜인 각본 속에서 사고는 멈추고, 질문은 사라진다. 남는 것은 정답을 외우는 습관뿐이다.
직업이라는 오래된 틀
그러나 세상은 애초에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술과 예술, 삶과 일, 기획과 실행은 본래 얽혀 있고, 경계는 인위적인 구분에 불과하다. 이 경계를 허물고 유기적으로 사고할 때, 비로소 진짜 해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견고한 경계, ‘직업’이라는 오래된 틀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인류는 오랜 시간 농업을 중심으로 살아왔다. 대부분의 사람은 ‘농부’라는 정체성 안에서 살아갔고, 역할은 유동적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분업화가 진행되며 사람들은 각자의 전문 영역에 고정되기 시작했고, ‘직업’은 정체성을 정의하는 강력한 틀이 되었다. 한 가지 전문성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회의 기본값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근대 산업사회와 달리, 우리는 이제 AI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에 진입했다. 이 변화 속에서 인간은 다시 본질을 묻게 된다.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일은 대부분 AI가 대신할 수 있다. 이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창의성과 문제 해결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일 분야의 전문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창의성이란 단순히 아이와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는 참신함만 해당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지식과 맥락을 연결하여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만드는 힘이 창의성을 더 잘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융합지식은 발전하고 있다. 단지 학계의 유행어가 아니라, 많은 대학과 교육기관들도 전공 간 경계를 허물고, 융합적 사고를 기르는 커리큘럼을 강화하고 있다.
문제에 집중한 사람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한 우물 파기’가 미덕인 시대다. 몇몇 사람들은 직무 타이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이 맡은 역할만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집중한다. 물론 조직 내 역할 분담은 중요하다. 전문성을 꾸준히 쌓아온 전문가의 깊이 있는 통찰은 여전히 사회의 중요한 자산이다. 이 글이 특정 분야의 전문가나 장인정신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할에만 고착되어 문제 해결의 본질을 외면하는 태도는 다시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결국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문제를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이다.
역사적으로도 위대한 성취는 경계를 넘은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과 과학, 해부학과 공학을 넘나들었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정치와 발명, 외교를 넘나들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 현대에는 일론 머스크처럼 기술과 비즈니스, 우주 산업까지 아우르는 사람들이 혁신을 주도한다. 이들은 '직업'보다 '문제'에 집중했고, 역할의 경계보다는 해결의 실천에 집중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본질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 활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제작자’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제품을 제작하는 것 뿐만아니라, 새로운 마케팅 아이디어, 시장들을 정의내리는 지식적 제작을 포함한 넓은 범위의 제작자를 의미한다. 인간이 제작자로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은 곧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일이다. 어떤 역할이든 그것은 임시적인 형태일 뿐, 본질은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꾸려는 태도에 있다. 이러한 본질에서 벗어나 문제 해결에 집중하지 않고 직업적 경계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만들기 쉽다. “나는 프론트 개발 다 끝냈어요.” “서버 API 개발은 완료됐습니다.” “기획은 끝났어요.” 이런 말들은 책임의 분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동의 목적에 대한 관심 부족에서 비롯된다. 문제 해결보다 역할 수행에만 집중하면 협업은 분열되고, 창의성은 말라버린다.
스스로의 본질
나 역시 지금까지 다양한 꿈을 품고, 기획과 디자인, IT 개발, 3D 모델링, 드로잉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탐구해왔다. 각각의 기술은 나에게 있어 정체성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였고, 새로운 시야를 여는 창이었다. 나는 디자인을 통해 메시지를 시각화하고, 코드로 기능을 설계하며, 공간을 구성하고, 선으로 사고를 정리한다.
이러한 도구들을 통해 나는 '세상을 더욱 재미있는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내게 있어 이 모든 역량은 흩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방향성이다. 그 중심에는 늘 ‘사람’과 ‘문제’가 있으며, 나는 그것들을 새롭게 엮어 의미 있는 형태로 바꾸는 제작자가 되고자 한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낸다. 어떤 일을 하느냐는 단지 생계를 결정하는 요소를 넘어, 인맥, 문화, 소득, 사고방식 등 삶의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직업은 종종 개인의 정체성 그 자체로 여겨진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한 가지 직업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삶이 충분히 의미 있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 그것이 곧 안정이자 자부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를 규정하는 이 '직업'이라는 이름표가 때때로 사고를 가두는 틀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정체성이 직업이라는 경계에 의해 고정될 때,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에서 유한으로 축소된다. 직업이라는 오래된 경계 안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모두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